“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클립아트코리아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쉽게 잊히지 않는 풍경 하나쯤은 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들판, 가족이 함께 웃음꽃을 피우던 집, 해 질 무렵 골목을 채우던 익숙한 냄새와 소리 등 말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그런 기억을 가장 아름답고 선명한 우리말로 담아낸 작품이다.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면서도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네임드 달팽이
시 전반에 반복되는 이 후렴은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더욱 깊게 울려 퍼지게 한다.
고향을 그리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일부를 표지화로 삼은 ‘정지용 시집’. 국립중앙도서관
‘향수’는 정지용이 1923년에 창작한 자유시로, 1927년 잡지 ‘조선지광’에 발표됐으며 이후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에 수록됐다.
작품은 10연 26행으로 구성돼 있다. 고향의 풍경과 사람들을 묘사한 뒤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라는 후렴이 이어지는 형식이 다섯 차례 반복된다. 이 후렴은 음악적인 운율을 형성하는 동시에 작품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시 속 고향은 넓은 들판과 실개천, 느긋하게 울음을 우는 황소가 있는 농촌 마을이다. 화자는 밤바람이 스치는 들녘과 짚베개를 베고 누운 아버지, 풀섶을 헤치며 뛰놀던 어린 시절, 누이와 아내가 일하던 모습을 차례로 떠올린다.
이곳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이자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삶의 터전으로, 소박하지만 따뜻했던 일상의 모습이 작품 전반에 흐른다.
특히 ‘얼룩백이 황소’ ‘해설피’ ‘짚베개’ ‘함추름’ ‘석근 별’ 같은 토속적인 시어와 순우리말은 작품 특유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정지용은 고어와 방언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우리말의 표현 가능성을 넓혔다
바다이야기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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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연에는 초라한 지붕 아래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는 떠나온 고향을 향한 애틋한 정서가 잔잔하게 스며 있다.
일제강。기에 쓰인 작품인 만큼 ‘향수’는 단순한 향토시를 넘어 고향과 삶의 터전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까지 담아낸 작품으로도 읽힌다.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길을 연 정지용
시인 정지용. 정지용문학관
정지용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인 그는 국내외 문예지에 시와 번역 작품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서구 문학의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에 담아내는 데 힘썼다.
그는 대상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이미지즘과 모더니즘을 한국 시단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형태주의적 기법을 시도한 대표적인 이미지스트이자 모더니스트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대표작으로는 ‘향수’를 비롯해 ‘유리창’ ‘고향’ ‘백록담’ 등이 있다. 1935년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1941년에는 두 번째 시집 ‘백록담’을 펴냈다.
광복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와 언론 활동 등을 이어갔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기간 작품 세계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지만, 1988년 작품 해금(解禁) 이후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오늘날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신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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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옥천에 남은 ‘향수’의 흔적
정지용문학관 전경. 한국관광공사 김지호
정지용의 고향인 옥천에는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공간들이 남아 있다.
옥천 구읍 죽향리에 있는 정지용 생가는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원래 생가는 1974년 철거됐지만 1996년 옛 모습을 바탕으로 복원됐다. 초가집 형태의 단층 한옥이 당시 농촌 생활의 모습을 전한다.
생가 옆에는 2005년 개관한 정지용문학관이 자리한다. 이곳에는 연보와 육필 자료, 시집 초간본 등 다양한 전시물이 마련돼 있어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영상실과 문학교실, 체험 공간도 운영돼 시인의 문학을 더욱 친숙하게 접하게 한다.
광장에는 가수 이동원과 성악가 박인수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이 1989년 발표한 노래 ‘향수’는 큰 사랑을 받으며 정지용의 시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어느 날 스쳐 가는 바람 냄새나 저녁 하늘의 빛깔 하나가 문득 오래전 기억을 불러올 때가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그렇게 가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각자의 고향을 깨워내며,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풍경을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미리캔버스 제작
일시(一詩)는 하나의 시를, 정지(整枝)는 가지를 다듬어 더 고르게 자라게 하는 일을 뜻한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쉼 없이 쏟아지는 시대, 잠시 도파민에서 멀어져 한편의 시로 마음을 가다듬고 삶의 균형을 되찾는 여유를 제안하는 이 코너는 ‘디지털농민신문’에서 한발 앞서 만날 수 있다.
을 기리는 공간들이